사람들이 거반 죽게 된 여인을 의사에게 데려왔습니다. 그 여인은 임산부였고 몇 주 전부터 고통으로 앓아누웠다고 합니다. 마을 사람들은 민간요법으로 치료하기 위해 애써보았지만, 차도가 없어 의사에게 온 것입니다. 의사는 진맥했고 뱃속의 아이는 맥이 뛰지 않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대로 두면 산모마저 죽을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의사는 산모를 살리기 위해 뱃속의 죽은 아이를 끄집어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여인의 남편이 허락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마을 주술사에게 데려가면 낳을 수 있다고 우겼습니다. 백인인 의사의 말은 듣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백인 의사는 죽어가는 여인 앞에 분통이 터져 죽을 지경이었지만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그 남편은 자신의 전통과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 아내를 데리고 병원을 떠났습니다. 의사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자존심을 내세우느라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지 못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얼마나 답답해하실까?'라고 말입니다. 이 글은 맥스 루케이도(Max Lucado)가 쓴 '작은 소리 주님의 음성 큰 울림'이라는 책에 기록된 내용 중 일부입니다.
우리는 종종 그동안 지켜오던 전통이나 습관, 혹은 인간적 자존심 때문에 현 상황의 위기를 더욱 악화시키거나 곤란한 위기 속에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붙잡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종종 신문이나 미디어에 등장하는 '명예살인'이라는 내용도 이와 같습니다. 이슬람교도들은 자신의 명예나 전통을 지키기 위하여 자녀나 가족들이 개종하거나 전통에 어긋나는 상황을 만들면 가족을 살해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 모릅니다. 이것은 진리를 위한 헌신도 구원을 위한 순교도 아닙니다. 그들이 믿는 '코란'이나 이슬람 교리에도 '명예살인'에 대하여 언급한 곳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들은 '알라'도 모르는 잔혹한 전통을 만들어 스스로 족쇄를 채우고 살아온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도 이런 모습들이 보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며, 자녀라고 입술로는 고백하면서 하나님의 말씀과 그 '아버지의 의'보다 내 의를 세우고,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 목회하고 신앙 생활하고, 봉사하는 사람들의 모습 말입니다. 이들은 과거 받은 은혜와 화려해진 형식과 교회의 겉모습을 전통이라는 포장지로 잘 싸서 서로 비교하고 자랑삼아 왔습니다. 여기에 부응하지 못하면 모자라고 능력 없는 존재로 치부하면서 말입니다.
목사님들은 만나면 어디서 목회하느냐, 교인은 몇 명이냐, 교회는 지었느냐 등등 나누는 이슈들이 그렇습니다. 그러니 대화에 질세라 허수를 만들고 없는 이야기에 하지도 않은 공부의 학위들까지 하나씩 만들어 달고 다니는 지경이 된 것입니다.
목회자들이 이 정도면 교인들은 어떻습니까? 만나면 교회 자랑이 복음이 아니라 교회 크기이고, 숫자입니다. 교회가 몇 부 예배를 하는지, 실력 있는 사람, 거물이 얼마나 많은지, 프로그램은 뭐가 있는지가 주 내용입니다.
얼마 전 다녀온 고국의 교회 상황이 참 아쉬웠습니다. 교회 속에 안타까워하는 마음들은 많은데 세상을 향하여 당당하게 '내가 세상과 하나님 앞에 구원을 이루기 위하여 복음에 부끄럼 없이 살았노라'고 말하지는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요즘은 교회가 뭐라고 한마디 할라치면 세상이 난리가 난답니다. 아마 교회나 성도가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해 달려온 것이 아니라 목사가, 교인이, 자기 의를 이루기 위해 달려왔기에 수적인 증가와 보이는 현상은 화려하지만, 세상의 비난조차 당당하게 맞설 능력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던 때를 기억하십니까? '세례'는 죄를 씻는 의식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실 이유가 없습니다. 이미 이름이 말씀하듯 '세상 죄를 구원하실 분'이시고, 씻을 죄가 없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도 찾아오신 예수님에게 세례 베풀기를 꺼려합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 봐야 합니다. 하나님이신 그분이, 결단코 있을 수 없는 일을 행하고 계시는 모습이 무엇을 말씀하실까?
교회는 권위와 힘을 사이즈나 보이는 것으로 재단하려던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목회자와 교인들은 자신들이 주장하고 고집해온 자존심과 기득권들을 포기해야 합니다.
그것이 교회가 교회답고 교인이 교인다워지는 길이며, 내 의가 아닌 하나님의 의를 이루어가는 진정한 교회와 성도의 면을 회복하는 길입니다. 그래야 우릴 보고 답답해하신 하나님께서 시원하게 웃으시며 마지막 때 당당한 교회와 성도로 사용하실 줄 믿습니다. @Kis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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